김기찬 / 고용노동선임기자

한국판 후버전쟁 벌어지면 이길 여력 있나 따져야
노동국경 지키려면 기업의 혁신을 돕는 정책 필요

1993년 1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경제전쟁이다. 정확히 말하면 노동전쟁이다. 미국 가전업체 후버의 생산공장을 두고서다. 후버는 프랑스 디종에 있던 공장을 영국으로 옮긴다고 발표했다. 후버가 어떤 회사인가. 후버라는 기업명이 진공청소기를 대신할 정도로 상징성이 남다르다. 후버는 “생산비 절감을 위해 생산기지를 한 곳으로 집결시킨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생각은 달랐다. “영국을 유럽사법재판소에 제소하겠다”고 했다. 영국 정부가 후버에 공장 이전 등의 비용으로 250만 파운드를 지원하는 걸 문제 삼았다. 졸지에 글로벌 생산기지를 빼앗기는 데 대한 분노가 프랑스 전역을 뒤흔들었다.

분쟁의 핵심은 일자리 문제다. 후버의 영국 이전으로 프랑스 근로자 620명이 ‘진공청소’됐다. 협력업체까지 따지면 수천 명이 피해를 봤다. 당시 유럽은 장기 경기침체로 심각한 실업난에 봉착했다. 프랑스도 300만 명이 실업에 내몰렸다. 이런 상황에서 글로벌 회사의 공장 이전은 연쇄 악순환 효과를 부를 수 있다. 프랑스는 이를 우려했고, 영국은 이걸 노렸다. 프랑스는 당시 상황을 ‘후버전쟁’이라 부르며 아직도 되새긴다.

노동전쟁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각국이 법인세를 앞다퉈 내린다. 심지어 공장용지까지 무상으로 내준다. 전기료를 깎아주고, 운송비 혜택까지 주는 나라도 있다. 일자리를 늘려 국민을 풍요롭게 하고 국부를 축적하기 위해서다.

기업이 최적지를 찾아 쇼핑에 나선 지는 오래됐다. 한번 옮겼던 공장도 과감히 다시 옮긴다. 예전엔 인건비를 따졌다. 그래서 중국이나 동남아가 주목 받았다. 지금은 아니다. 인건비와 세제 혜택은 물론 기업 이미지, 운송비, 근로자 숙련도, 정치 리스크 등 다양한 경영 환경을 고려해 최선을 찾는다. ‘가성비’와 혁신의 조합지역을 물색하는 셈이다. 리로컬라이제이션(Relocalisation·공장 재이전) 물결이다.

지난해 12월 독일 보쉬는 터키 공장을 파리 동북부 생상드니로 이전했다. 인건비는 터키가 훨씬 싼데도 말이다. 보쉬는 자동생산공정으로 인건비 상승분을 상쇄시킬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자동생산공정에는 막대한 전기가 필요하다. 프랑스는 원자력 발전 강국이다. 여기에다 사통팔달의 수송망은 운송비 절감 효과를 가져다 준다. 터키 내부의 정치리스크에 대한 걱정도 털어낼 수 있다. 맹목적인 생산비 절감이 아니라 인프라 등 혁신역량을 강화하는 데 무게를 뒀다는 얘기다. 싼 인건비만 보고 이전한 공장이라면 재이전 유인도 그만큼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라고 다르지 않다. 한국GM의 고위 간부는 얼마 전 이렇게 말했다. “GM이 아직 한국을 떠나지 않는 건 GM 직원이 꼭 아쉬워서가 아니다. 협력업체 때문이다. 인건비에 비해 협력업체 근로자의 숙련도가 높다. 불량률이 전 세계에서 가장 낮다. 나머지 인프라는 GM의 다른 공장이 있는 국가보다 형편없다.” 협력업체의 실력이 유일하게 한국GM의 공장 철수를 막는 방패막인 셈이다. 역으로 협력업체의 ‘가성비’가 낮아지면? 답은 뻔하다.

기업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최적지 쇼핑을 하는 시대다. 그래서 세계 각국이 ‘노동국경’에 주목한다. 노동 국경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운영하느냐가 일자리의 성패를 좌우한다. 기업이 국경 울타리를 쉽사리 넘어 들어오게 하고 나가는 걸 막는 데 진력한다. 그게 노동국경을 지키는 일이다. 일자리라는 튼튼한 방호막을 치는 일이다. 한데 우리는 어떤가. 전기료 인상이 불가피한 원자력발전소 폐쇄, 근로자 4명 중 한 명이 최저임금 대상자가 될 정도로 급격히 오르는 인건비, 법인세 인상, 정권 교체와 함께 확 바뀌는 경제정책에서 드러난 정치 리스크…. 우리는 노동국경을 지킬 힘이 있는가. 한국판 후버전쟁이 벌어지면 이길 자신이 있을까. 아무리 봐도 노동국경을 넘어오려는 기업보다 나갈 유혹을 느끼는 기업이 많아질 것 같아 드는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