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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차파 캠프는 미주 한인 독립운동의 '메카'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
장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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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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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 리버사이드 시청 앞 시민광장에 세워진 도산 안창호 선생 동상 건립 10주년을 축하하는 행사가 지난 2011년 8월11일 열렸다. 미주 도산 안창호선생 기념사업회 관계자들과 러버릿지 리버사이드 시장, 최용진 부총영사가 동상에 헌화한 후 도산의 동상을 바라보고 있다.
   
▲ 리버사이드 시청 앞 시민광장에 세워진 도산 안창호 선생 동상 건립 10주년을 축하하는 행사가 지난 2011년 8월11일 열렸다. 미주 도산 안창호선생 기념사업회 관계자들과 러버릿지 리버사이드 시장, 최용진 부총영사가 동상에 헌화한 후 도산의 동상을 바라보고 있다.

도산 주도로 한인 노동자 이주시켜 형성
정착에 필요한 직업과 이민정보 등 제공
안창호의 초기 파차파 활동 새로 밝혀져

들어가는 말

도산 안창호는 이승만, 박용만, 서재필 등과 함께 초기 미주 한인사회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친목회, 공립협회, 대한인국민회, 흥사단 등을 조직하고 미국, 중국, 멕시코, 러시아, 다른 여러 국가들을 순방하고 그들과 함께하면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도산 안창호의 영문 전기 저자 김형찬은 안창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안창호는 일제 강점기를 즈음한 1895년부터 1945년 사이 한국 민족주의 인물 중 근대 민족주의를 발전시킨 가장 위대한 역사적 인물이다."

안병욱은 "도산은 위대한 애국자, 교육자, 철학자, 개척자, 그리고 독립운동의 지도자"라고 표현했다.

인도의 간디와 중국의 쑨원에 버금가는 안창호는 정신적 지도자이며 공화국 혁명가이다. 안창호는 헌법 민주주의를 추구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전쟁도 이끈 인물이다.

두번째 미국 방문 시기인 1911년~1919년은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 조직 활동을 왕성하게 벌인 기간이었다.

마지막 1924년~1926년에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미 서부와 시카고 등 미 중부, 워싱턴DC 등 동부 일대까지 미 전역을 누비며 동포들을 감화시켰고 민족정신을 일깨웠다.

이처럼 안창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긍정적인 측면이 매우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창호에 대해 잘못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이 많이 있다.

특히 이 글은 지금까지 도산 안창호 선생의 미주 한인 사회에서의 활동 중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 특히 초기 활동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안창호 선생이 리버사이드에 파차파 캠프 또는 도산 공화국을 만들어 미국 최초의 한인타운을 건립했다는 것과 파차파 캠프가 초기 도산 안창호의 독립운동의 메카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관한 것이다.

이것을 새로운 사료 발굴로 밝히고자 한다. 특히 도산 안창호의 리더십과 한인들을 조직적으로 리버사이드로 이주시킨 공립협회의 계획으로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는 당시 한인들이 세운 최초이며 최대의 한인타운으로서 중심지가 되었다.

1905년 파차파 캠프 공립협회 회원이 70명이며 1907년에는 150명으로 늘었다. 부인과 자녀들을 합치면 200명이 넘는 한인타운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또한 1926년에 안창호는 미국 이민국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었는데 그 이유를 찾고자 한다. 즉 누구에 의해, 어떻게, 왜 추방당했는지를 이 글에서 밝히고자 한다. 즉, 도산 안창호가 처음 미국에 도착한 후 초기에 건설한 파차파 캠프에서의 활동과 마지막 시기인 1924년부터 1926년까지 미국에서의 활동과 추방 과정을 밝히는 것이 이 글의 주요 목적이다.

또한 도산 안창호에 관해 잘못 알려지거나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새로 발굴하여 도산 안창호 연구의 공백을 메우는 것 또한 이 글의 주요 목적이다.

아울러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도 잘못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를 발굴하여 재정립한다는 의미도 있다고 생각된다.

'문화 관심지' 파차파 캠프

2017년 3월 23일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 시 철도 옆에 위치한 미국 최초의 한인타운 파차파 캠프를 '문화 관심지'로 지정하는 행사가 약 200여 명의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열렸다. 또한 2001년 8월 11일 리버사이드 시 시청 앞 유니버시티와 메인 길에서 미주 도산 안창호 기념 사업회(이사장 홍명기) 주최로 도산 안창호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LA에서 60마일 동쪽에 위치한 소도시 리버사이드에 왜 도산 동상이 건립되었으며 리버사이드 시는 왜 파차파 캠프를 '문화 관심지'로 지정한 것일까? 그리고 문화 관심지로 지정된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미주에서의 도산 안창호의 업적은 주로 샌프란시스코와 LA에서의 활동이 부각되어 왔기 때문에 도산 안창호 전기에는 리버사이드가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거나 '하변'에서 거주했다는 정도로 소홀히 취급되어 왔다.

미주 한인사를 총 정리한 최봉윤의 저서 '미국 속의 한국인'에서도 리버사이드로 이주한 한인 노동자들을 1장 미만의 분량으로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의 실체를 밝히고 그 의미를 찾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

이선주는 '리버사이드에서의 도산 안창호의 활동:1904~1914'에서 도산 안창호의 생애 중 리버사이드가 매우 중요한 거점이었지만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도산 안창호와 가족은 1904년 3월부터 1913년 12월까지 리버사이드에서 거주하면서 미주 최초의 한인타운인 파차파 캠프, 즉 도산 공화국을 설립하였다. 그 곳에서 초기 미주 한인 사회 독립운동의 초석을 다졌다. 이선주는 도산 안창호와 가족이 1914년 초에 LA로 이주한 것으로 보았으나 실제로는 1913년 12월에 LA로 이주한 것이 확인되었다.

도산 안창호의 초기 미주 독립운동의 메카 역할을 한 곳이 바로 리버사이드의 파차파 캠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도산 안창호의 리버사이드 활동이 주목을 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며 왜 그 실체가 밝혀지지 않았을까?

도산은 리버사이드로 이주한 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한 친목회를 공립협회로 발전시키면서 본부는 샌프란시스코에 두었다. 1909년에 대한인국민회가 창립되었을 때 발기인들의 상당수는 리버사이드 거주자들이었지만 역시 본부는 샌프란시스코였다.

이선주는 공립협회가 하와이에서 본토로 이주한 한인들에게 3가지 도움을 주었다고 요약하고 있다.

"첫째, 샌프란시스코 이민국 신체 검사관인 드류 의사의 도움을 받아 배를 타고 건너오는 한인들이 신체검사에서 불합격되어 돌아가지 않도록 하였고, 둘째, 한인 노동자들에게 철도 건설 공사장과 광산, 그리고 농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으며, 셋째, 샌프란시스코에서 480마일 떨어진 리버사이드까지의 기차표를 사주고 이동방법과 경로를 알선해 주었다."

이것은 도산 안창호와 공립협회가 조직적으로 한인 노동자들을 리버사이드로 이주시키고 그 곳에서 한인타운을 형성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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