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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의 빛나는 단역, 김주경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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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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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언 / 전 국회의원

일본 군인 죽이고 인천감옥 수감된 김구
강화 건달이 극진한 옥바라지 탈옥 도와
요즘 세상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스토리

‘대장 김창수’란 영화를 보았다. 영화 시작 전 자막에 ‘사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야기라는 설명이 나온다.

여기서의 사실은 백범일지를 가리킨다. 우리가 잘 아는 백범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의 일부분을 발췌하여 극화한 것이다. 물론 영화답게 사실과 허구가 적당히 버무려져 있다. 백범일지가 영화화된 것은,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시대가 바뀌니 김구 선생의 삶이 역사적으로 재조명되는 계기가 아닌가 했는데, 흥행에는 별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 같다.

영화는 사형수 김창수가 인천 감옥을 탈옥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가 무척 아쉬운 대목이다. 실제의 백범일지에는 김구 선생의 탈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 잠깐 나온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가 바로 그를 소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김주경. 김주경의 스토리는 대강 이렇다.

황해도 일대에서 동학군으로 의병활동을 하던 백범은 국내에서의 투쟁의 한계를 절감하고 외국으로 나가 항일운동을 계속할 결심을 한다. 연해주 쪽으로 가던 백범은 한만 국경 부근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그런데 그 여관에서 우연히 사복을 한 일본 군인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민비를 죽인 시해범의 일파라고 나름 확신한 백범은 그를 맨손으로 때려죽인다. 현장에서 체포된 백범은 인천 감옥에 수감되고, 훗날 탈옥할 때까지 여기에 갇혀 재판을 받는다.

당시 백범에 대한 재판은 장안의 화제였다. 일본인 살인사건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재판관까지 호통을 치는 백범의 당당함이 서울까지도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때 백범의 재판을 구경하러 온 사람 중에 강화도 건달이 한 명 있었다. 그가 바로 김주경인데, 그는 호랑이와 같은 백범의 기백과 풍모에 단번에 매료된다. 그 후 김주경은 백범의 옥살이를 극진하게 뒷바라지한다. 매일같이 사식을 넣어주고 옷가지를 챙겨주는 그의 성심 덕분에 백범은 비교적 편안한 옥살이를 한다(이 부분이 영화와 사뭇 다르다). 여기서 백범은 동료 죄수들에게 한학을 가르치며 훈장 노릇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백범이 살인범이라는 사실은 분명했기에 사형은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선고를 앞두고 김주경은 백범을 탈옥시킬 것을 결심한다. 그 즈음 김주경은 지금의 화투장에 해당하는 골패를 다량 제작하여 강화도와 인천 일대에 싼 값으로 뿌린다. 물론 그 골패에는 김주경만이 알 수 있는 표시가 다 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김주경 자신이 투전판에 뛰어든다. 승패는 물어보나 마나, 김주경은 엄청나게 돈을 땄고, 이 돈으로 인천 감옥의 간수들을 매수한다.

단단히 매수된 간수가 방관하는 가운데 유유히 감옥을 빠져 나온 백범은 김주경이 써준 여러 장의 서찰을 들고 지방으로 피신한다. 처음 간 곳이 공주 마곡사 부근인데 김주경의 서찰을 읽어본 집 주인은 난생 처음 본 백범에게 큰 절을 올리고 극진하게 모신다. 그러다가 그의 소재가 주위에 알려질 만하면 다시 김주경의 서찰을 들고 길을 떠난다. 이런 식으로 남한 일대를 주유천하 하던 백범은 마침내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훗날 해방이 되고 상해 임시정부 수반이 되어서 귀국한 백범이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이 바로 김주경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수소문 끝에 그는 이미 오래 전에 비명 객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백범이 그 자손이라도 찾겠다고 해 다시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김주경의 아들을 찾았으나 거의 비렁뱅이 수준이었다고 한다. 백범은 김주경의 아들의 손을 잡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으리라.

이것이 백범일지에 등장하는 일개 비천한 건달 김주경에 대한 스토리의 전부다. 비록 짧은 스토리지만 여기에는 낭만, 우직함, 의리, 애국, 민족애, 화끈함 등이 다 들어있다. 요새 세상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것들이다. 필자는 아직도 이 땅에는 수많은 김주경들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이 극진하게 뒷바라지 하고픈 지도자는 어디에 꼭꼭 숨어 있는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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