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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 서예가 다나카 유운(田中佑雲)이 갈망(渇望)하는 한일 평화공생
이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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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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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경 / 도쿄가쿠게이대 교수

   
 

다가오는 12월30일은 시인 윤동주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평화의 상징이자 민족 시인, 저항시인으로 평가받는 윤동주의 존재감만큼이나 한중일 시민 관계자들도 그를 기억하는 다양한 형태의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다.

필자는 매년 일본에서 교사가 될 3, 400명의 학생들에게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인류 동포’라는 의식과 더불어, 송몽규와 윤동주, 그리고 일본의 침략 행위에 저항하다 죽어간 일본의 천재 시인 마키무라 코(槇村浩), 츠루 아키라(鶴彬) 등의 양심들을 통하여, 인권이 짓밟힌 광기어린 군국주의 시대가 두번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된다는 지구촌 사회의 평화적 공생을 역설해 오고 있다. 그런 필자의 인권 수업에 초청하여 수강생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던 일본의 서예가 다나카 유운(田中佑雲) 씨를 소개하려 한다.

2010년에 필자가 송몽규, 윤동주의 추모회를 열면서 알게 된 이 서예가는 개인의 명성이나 이해타산이 아닌 순수한 한국문화 사랑으로 한일 시민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지방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이제는 서예가로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그가 한글로 된 시를 작품으로 적게 된 계기가 윤동주의 시와의 만남이었다고 한다.

근대사에서부터 다양한 국제 인권문제까지 연구해야 하니 필자는 많은 역사의 현장에 관여하게 된다. 여러 교수들과도 공감하는 부분이지만, 특히 최근에는 어떤 이해타산의 의도나 소유욕으로 치러지는 역사 비즈니스가 횡행하는 구조가 씁쓰레함을 자아내는 장면을 많이 접하게 된다. 그런 실망이 겹치다 보니 그 어떤 화려한 자리도 결국 순수성은 결여되고 돈과 사람이 얽히고설킨 곳에는 관여하지 않으려고 관계를 멀리하게 된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을 봐 온 서예가 다나카 유운씨는 자신의 올곧은 신념과 양심으로 일관성 있게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는 작가이다. 그가 사욕을 떠난 한일 평화사회를 향한 갈망과 소박한 시민교류의 지향을 하게 된 계기가 적힌 글이 왔기에 여기에 소개해 두려고 한다.

다나카 씨는 한국과의 역사와 문학, 일본과의 근대사에 지식을 가지려고 노력하며 한일 양국의 미래지향적인 대화를 모색하려하는 정직한 시민이다. 이러한 일본 시민과 함께 한일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으로, 문 대통령이 방일 때, 흔들리지 않는 한일 시민교류의 기반을 만들어 온 교류의 상징으로 격려해 주는 기회도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일전의 칼럼에서 소개한 적이 있다.

화려한 활동보다 겸손하게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다나카 씨가 만나는 윤동주나 이육사, 김구 등의 글이 새로운 미래를 잇는 가교가 되고, 다나카 씨의 순수한 활동이 한일관계를 초월한 동아시아사회의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윤동주와의 만남과 그의 어머니에 대한 글을 번역, 소개하며, 엄동설한의 연말연시, ‘윤동주’라는 특별한 존재만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 종교, 정치 등을 초월하여 모든 부조리한 횡포 속에서 아파하고 신음하며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힘들어하는 이웃에도 손을 내밀 수 있는 따스한 우리 사회로 가슴이 훈훈하게 추위를 이겨낼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고로 이 글은 지난 칼럼 소개 이후, 다나카 씨가 적어서 보내 온 원문을 필자가 어려운 용어나 시(詩)적인 표현을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글로 알기 쉽게 번역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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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양국의 하늘에 빛나는 맑고 찬 별을 따라서
-어둠을 뚫는 사랑의 시상(詩想)을 붓에 맡기며-

다나카 유운(田中佑雲) / 일본 서예가

2011년 3월, 자그마하게 개인전시회를 필자의 아트리에에서 가졌다. 하필이면 동일본대지진,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로 인한 미증유의 사태 소식이 이어졌고, 서예전을 중지해야 할지 망설였지만, 이미 지인들에게 안내를 해버린 상태였기에 전시장에 오기 곤란한 상황을 예상하면서도 개최하기로 하였다. 오히려 힘든 때일수록 내 작품을 통하여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할 수 있다면 하는 불손한 바람을 가지면서.

또한 94세를 맞는 어머니 이야기도 전시용 작품 속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 동안에 개최해야겠다는 조급함도 앞섰다. 참고로 개인전은 아트리에를 설계한 것을 계기로 4년마다 회를 거듭하여 3회 째를 맞은 것이었는데, 주제는「고통을 함께하는 지평(공고의 지평, 共苦の地平)」으로 첫 전시회부터 변함없는 주제였다.

이번에는 특히 한글 작품(조선 시인의 원문 한글과 일어 번역을 섞은 것)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 속에서도 윤동주의 시를 중심으로 한 전시였다. 작품은 21점이었는데, 석문에 낙필까지 한 경위 등, 적나라하게 세세히 적었기에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부끄러웠고, 모순 같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안내 하는 것도 망설여졌다.

   
▲ 왼쪽은 윤동주의 '서시' 일부, 오른 쪽은 다나카 작가와 그의 아트리에에 걸린 이육사의 시.

지금까지 인생에서 있었던 다양한 만남, 혹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시인의 시로 마음을 달래며 서예 작업에 임해왔지만, 그(윤동주)의 27세라는 짧았던 생의 발자취와 함께 우연히 인연이 닿은 재일한국인의 국제적 사업가 모씨의 극진한 안내로 청천벽력같이 이뤄진 (윤동주, 송몽규의) 생가와 무덤을 방문했던 여행 기억이 그때까지 필자의 작풍을 바꿔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윤동주를 만나기 전까지는 내가 동경하며 작품에 도입했던 일본의 시인으로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와 야기 쥬키치(八木重吉)가 있다.

쥬키치는 그(윤동주)처럼 ‘별과 같은 시인’으로 평가받으며 시단과는 무관하게 29세로 1927년에 세상을 떠난 크리스찬 시인이다. 시는 모두 평범하며 짧지만 자기를 내면에서 지탱하는 강함으로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한다. 천부적으로 읽혀지던 그 시정은 윤동주의 그것과 혹사하여 시대는 다를지라도 고고하게 산 그들의 시신(詩神)은 내 마음을 강하게 잡았다.

고등학교 1학년(16살) 때 우연히 알게 된 ‘비(雨)’라는 제목의 시 속에 ‘비가 개이듯이 조용히 죽어가야지 (雨があがるように静かに死んでいこう)’ 라는 한 구절에 깊이 감동한 이래 4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아직도 세상을 방황하고 있는 내 모습에는 고개를 숙일 뿐이지만, 쥬키치의 경우와는 차원을 달리하여 식민지하의 조국을 떠나 침략국이었던 이국 땅 일본으로 건너와서 보다 긴장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려 했던 그의 처지는 무서움을 머금고 내 앞에 우뚝 섰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空と風と星と詩)’의 ‘서시(序詩)’(이부키 고 伊吹郷 역)를 알지 못했다면 아마도 조선어(한글)를 깊이 배우려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나 역사의 조건을 초월하여, 인간이 개체로서 사는 그 근원적인 충동에 바라는 그의 짧은 시에 나는 깊이 감동했다.

운명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한 편의 시와의 결정적인 만남은 그 뒤의 나의 서예 세계를 풍요로운 미주(迷走)로 이끌어 갔다. 요컨대 그 시정을 원어 특유의 아름다운 음향으로 낭독하면서 서작운필이 가능하다면…하는 바람도 하지만, 일본인인 내게는 너무나도 어렵고 아직까지도 멀기만 하다….

그의 시는 절규하듯이 과격하게 돌려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놓인 정황에 갈등, 자성하듯이 적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근심을 위로받는다. 그의 시를 세상 밖으로 소개한 시인 정지용은 윤동주의 시집 서문에 ‘虚其心、実其腹、弱其志、強其骨(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우며, 허영된 뜻을 약하게 하여, 뼈를 튼튼하게 한다)’라는 노자 3장의 글을 인용하여, 그는 “마음이 약했기 때문에 서정시에 뛰어났고, 뼈가 튼튼했기에 일본이라는 강도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얻었지 않은가”라는 글을 싣고 있다. 모국어도 생명도 짓밟은 일본에 무의식의 가해자로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에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미야자와 겐지 또한 이상의 실현에 격한 희구, 구도맥진(求道驀進) 하듯이 시를 짓는 한편,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끝을 본 듯한 자신의 한계를 한탄하듯이 토로하는 부분에 내가 공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자그마한 기적을 일으킬 힘이 갖고 싶다. 이 큰 하늘에 마는 없단 말인가?” 겐지가 읊었던 시 한 수, ‘서시(序詩)’는 상기시킨다.

적는다는 것, 즉 인간의 진실을 생각한다는 것. 전에 다녔던 한글강좌의 강사로부터 조선어의 ‘그리다’로 ‘(그림을 그리다)描く、思い描く’와 함께 ‘(먼 곳의 사람을) 그리워하다. 기리다’의 양쪽 뜻이 있다는 것을 배우고, 붓도 단순히 필기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가 정신이라는 것을 터득하게 해 줘서 감동했던 적이 있다.

   
▲ 김구의 '나의 소원'

그러다 그토록 재능 없던 필자가 한글이라는 이웃 나라의 심오한 언어의 숲으로 조심스레 다가서려고 중급편 교과서를 접했을 때 그 책에서 그와 쌍벽을 이루던 이육사의 시 ‘광야(曠野)’와 만났다. 난해하면서도 결백한 지조에 윤동주와 만났던 때처럼 빠져들었다. 일제말기 암흑기 때 윤동주와 더불어 민족시인, 저항시인으로 그 시는 빛줄기(光芒)를 발했다.

그리고 고향 안동시에 세운 문학관에서 개최한 문학행사(詩祭)에 주제넘게 그의 시를 적은 졸필의 작품을 갖고 참가하는 기회를 얻었다. 꿈에도 생각 못했던 연말, 눈 오는 여행길, 짧았던 방문이었지만 그 만남은 강렬한 인상으로, 지금도 그 여파 속에 있다.

일제에 의한 투옥은 무려 17회나 되지만 굴하지 않았던 시작 활동. ‘시를 생각하고 짓는 것도 행동이다’는 말을 남기고 있는데, ‘강철의 무지개’라고 형용할 수 있는 그 뜻의 아름다움에 그저 압도당할 뿐이었다.

문학관 옆에는 ‘절정(絶頂)’이라는 시비가 있고,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그의 동상이 편안하게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필경, ‘이 세계에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하고 한국과 일본의 하늘에 묻고 있다.

“사람이 되기 위해 서(예)를 배운다” 그렇게 돌아가신 스승님이 설파하신 신조를 좌우명으로 스스로 자아경계(自戒)하며 변변치 않은 서작(書作)을 계속 해왔지만, 윤동주의 ‘아우의 인상화’ 1절과 만나며 다시금 “서예에 사는 것은 무엇인가”를 계속 추구하며 살려고 한다.

여담이지만 내 어머니가 태어나신 해가 우연히도 윤동주와 같은 해(1917년)였다. 게다가 또 우연히 겹쳐지지만 그가 사망한 달이었던 2년 전 2월에 돌아가셨다. 97세의 천수를 누렸던 자연사이다.

분명 편안히 수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슬픔은 상상을 초월하여 어머니의 주검을 앞에 두고 보기 흉할 정도로 통곡을 했다. 화장을 치룰 때, 70년 전, 일제에 의해 죽음을 당한 가장 사랑했던 시인의 시신을 끌어안고 혹한 속에서 바다를 건너 긴 귀로를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의 가족들의 고충이 기억나서 너무나도 힘들었다. 요절한 시인과는 비할 수 없는 장수를 누린 어머니. 그러나 나의 내면에는 나눌 수 없는 두 사람의 영혼이 존재하고, 그 영혼과 서로 영향을 주면서 이 허무한 목숨을 매일 살려줘서 살고 있음을 깊이 느끼는 바이다.

초등학교도 만족스럽게 다니지 못한 궁핍함 속에서 도망치듯이 식민지하의 부산으로 홀로 도항했다는 어머니. 사실은 바다에 몸을 던지려 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대한 인식은 아쉽지만 어머니에게는 없었지만, 알지도 못하는 땅에서 따뜻한 밥을 얻어먹었던 것을 간혹 어설픈 한국말을 섞어가며 되풀이하듯 내게 말씀해 주셨다. 상당히 귀찮았던 침입자(闖入者)였을 어머니를 기적적으로 지탱해주셨던 분들의 고충을 생각하면 죄송할 따름이기에 필자는 복잡한 심경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옛날 어머니가 신세지셨던 분들을 뵙고 은혜를 갚을 기회는 도저히 이뤄지지 않겠지만, 시인 윤동주가 진정으로 깊이 원했던 꿈의 형태를 한 줄기의 필관(筆管)에 흘리며 앞으로 작품 활동을 지속하는 것으로 지금 이웃 나라에 살고 계시는 비록 단 한 분에게라도 보은하는 것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머니를 잃고 그야말로 식구조차 없는 천애고독의 내 남은 생에 잃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노화에 대한 앞날의 불안은 불식할 수 없지만 오히려 서예 작품 활동을 하다 죽을 수 있다면 비참한 객사도 바라는 바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다.

초라하게 만든 제단에 윤동주의 생가의 사진과 ‘별을 헤는 밤’의 시를 내걸고 멀리 기도를 드리며 아트리에(書庵)에 틀어박힌다.

어머니와의 이별은 윤동주와의 새로운 경지를 또한 열게 하며, 나의 작품의 먼 꿈으로의 충동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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