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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서의 ‘나라다운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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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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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 칼럼니스트

베트남 사람 살맛 나게 한 축구 감독
청산 정치에도 보편적 감동 필요해

   
 

요즘 베트남인들은 한 사람의 한국인에게 푹 빠져 있다. 그 사람 덕분에 살맛이 나고 그 사람 때문에 나라를 사랑하게 됐다고 말한다. 중국에서 열린 2018 아시아축구연맹(AFC) 23세 이하 챔피언십에서 베트남을 준우승으로 이끈 박항서 감독 얘기다. 그는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12위인 베트남팀을 맡아 넉 달 만에 기적을 만들었다.

기자는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 머무르다 중동의 축구 강국 카타르와 준결승전을 보게 됐다. 1200만 명이 산다는 도시에 움직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수십 명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맥줏집, 광장 등에 모여 TV 중계를 봤다. 때론 환호하고 때론 탄식했다. 연장전이 끝나고 승부차기에서 역전승을 거두자 수많은 국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베트남 국기를 흔들며 질주하는 무수한 오토바이 행렬과 함성이 장관이었다. 나에게 “코리안이냐” 묻곤 다짜고짜 껴안으며 엄지척을 하는 사람을 여럿 만났다.

그날 저녁 식사를 함께한 전 외교부 차관이자 초대 주한국 대사였던 응우옌푸빈(72)도 박항서의 마법을 얘기했다. “베트남 축구의 고질병은 체력이 허약하다는 것이다. 박 감독이 병을 고쳤다. 8강전의 이라크, 4강전의 카타르 모두 120분 풀타임을 뛰고 승부차기로 결판을 냈다. 지칠 줄 모르는 체력에서 근성과 집중력, 팀플레이가 나왔다.” “박 감독은 베트남 국민을 똘똘 뭉치게 했다. 한국과 베트남 국민을 형제처럼 이어줬다. 어떤 정치인·외교관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박항서는 2002년 월드컵 때 히딩크 감독의 수석 코치였다. 배경 무시, 실력 경쟁, 동기 부여, 연구 축구, 팀 스피릿. 히딩크 마법의 5대 요소를 박항서는 섭렵했다. 거기에 지리산 자락 산청 출신의 뚝배기 같은 인간미를 더해 “함께 뒹굴며 만들어 가는 축구”(중앙일보 정영재 스포츠 선임기자)를 성공시켰다.

지난 토요일 우즈베키스탄과의 결승전엔 폭설이 쏟아졌다. 푸른 잔디는 하얗게 변했다. 백설과 한파는 적도 근처 베트남 사람들에게 혹독한 환경이다. 선수들은 모두 장갑을 끼었다. 예순이 다 된 박항서만 맨손이었다. 뜨거운 열정이 폭발하는 듯했다. 연장전의 마지막 1분을 남기고 패전 골을 먹었지만 히딩크가 섞여 있는 박항서식 축구를 음미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는 투혼이 아름다웠다. 입체적 시야로 공간을 넓게 활용하다 상대의 빈 곳을 벼락처럼 치고 들어가는 전격성도 매력이다.

최연소 응우옌꽝하이 선수가 우즈베크의 그물망을 흔든 프리킥은 박항서 축구의 결정판이다. 꽝하이는 네 명이 가로막은 사람벽의 정면을 향해 머리를 살짝 넘기는 왼발 감아차기 킥을 쏘았다. 사람벽이 없는 쪽으로 몸을 날리려던 골키퍼는 허를 찔렸다. 끝없는 반복 훈련,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정교한 기술을 습득했을 때나 가능한 세트피스 플레이를 어린 선수가 침착하게 해냈다.

꽝하이의 프리킥은 16년 전 월드컵 터키전에서 한국의 전담 키커 이을용이 같은 상황에서 같은 방식으로 쐈던 왼발 슛과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 동일한 조건에서 최선의 솔루션은 시간이 흐르고 사람이 바뀌어도 하나밖에 없는 건지 모른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보편적인 감동은 이런 것이다. 다른 요인을 배제하고 개개인의 특성, 훈련과 실력으로만 겨루는 승부가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 져도 기분이 좋다.

그러고 보면 박항서의 매직은 기적이라기보다 기본이다. 기본이 감동을 만들었다. 기교와 공학으로 포장된 쇼는 오래 못 간다. 나라다운 나라 만들기, 적폐청산에도 보편적 감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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