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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평양선언’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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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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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내 책장에는 흰색과 검은색의 부석(浮石)이 놓여있다. 부석은 화산이 폭발하면서 뿜어낸 용암이 식어 돌처럼 굳어졌지만 물 위에서도 뜰 정도로 가볍다. 흰 부석은 백두산 정상에서 1980년대 말에 내가 직접 주워 온 것이다. 한라산의 검은 부석은 2004년 여름 서울구치소에서 나와서 40여년 만에 찾은 고향 제주도에서 한 친지로부터 기념품으로 받은 것이다. 백두산의 천지를 찾은 남북 정상이 맞잡은 손을 높이 든 사진을 보면서 두 화산석이 담고 있는 내 삶의 흔적도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조종(祖宗)의 산인 백두산에서 시작된 땅에서 대대로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을 태평양의 거센 바람으로부터 보호하는 한라산, 이 두 성산(聖山)의 이름만 들어도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뿌리를 생각하게 된다.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1874~1945)는 물리학에서 논의되는 ‘이론적’인 공간은 물론 조형예술에서 문제되는 ‘심미적’인 공간의 근원에도 상징적이며 주술적인 힘을 지닌 ‘신화적’인 공간이 자리한다고 주장했다. 우리에게는 백두산과 한라산이 바로 그러한 공간이다. 중국인에게는 태산, 일본인에게는 후지산이 그렇다.

그러나 ‘백두에서 한라까지’ 하나의 지맥으로 연결된 우리 땅은 70년이 넘도록 한가운데가 잘려있다. 휴전선은 우리를 긴장과 적대관계로 내몰고 우리의 자유로운 영혼도 억누르고 있다. 공간은 단순히 인간과 사물을 담고 있는 컨테이너가 아니며,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공간을 규정한다고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게오르크 지멜(1858~1918)은 지적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사회적 공간인 민족공동체의 단절이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지리적 의미의 국토분단이다.

한반도에서 군사적인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지대를 건설하기로 합의한 이번 ‘9월 평양선언’의 첫 번째 항목도 바로 이 새로운 공간을 창출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서해 ‘북방한계선’에 대한 남북 간의 합의에 대해 일부 야당과 보수세력은 현정부가 피로써 지킨 ‘북방한계선’을 포기했다고 비난한다. 경계선은 원래부터 전투적인 개념이다.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는 이 경계선을 남북이 서로 공존할 수 있는 3차원의 사회적 공간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럴 때 평화지대라는 개념도 성립 가능하다. 이 사회적 공간을 넓히면 넓일수록 평화로 향하는 길은 더욱 탄탄해진다. 우리 땅 전체가 하나의 평화지대가 될 때 우리는 통일도 이야기할 수 있다.

두 번째 항목은 남북은 교류와 협력을 증대시켜서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철도와 도로의 연결 및 이의 현대화, 그리고 개성공업지구와 금강산관광사업의 정상화에 대해서도 합의했다고 밝히고 있다. 현대사회는 시간과 공간을 응축(凝縮)하는 정보와 물자의 빠른 흐름을 가능케 하는 네트워크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1843년 5월, 독일의 혁명시인 하이네가 파리에서 기관차의 첫 운행을 보면서 이제 공간은 죽었고 시간만이 남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한말의 풍운아 김옥균도 1882년 수신사 박영효를 따라 ‘명치유신’의 일본을 둘러보고 남긴 <치도약론(治道略論)>에서 사람의 교류와 물자의 빠른 유통을 보장할 수 있는 도로가 사회개혁에 있어서 지니는 의의를 강조했다. 21세기에 걸맞은 민족경제의 균형적인 발전은 무엇보다도 남과 북이 상호 연결되는 ‘흐름의 공간’을 확충하면서도 ‘구체적 장소’인 남과 북이 각각 지니고 있는 경제적 구조와 특성을 살려야 한다. 지구화의 정도에 있어서 현재 많은 차이가 있는 남과 북의 경제사회가 짧은 시간 내에 같은 속도로 움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독일통일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기도 하다.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남북경협이 너무 속도를 낸다느니, 유엔의 대북 제재 규정을 위반할 소지가 많다고 벌써부터 어깃장을 놓는 세력이 있다. 경의선 철도의 북측 구간을 조사하려던 계획도 ‘유엔사’에 막혀 일단 무산되었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러나 분단으로 인해 기형화된 민족경제의 구조를 선순환적인 구조로 전환하는 과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북녘 땅에 있는 귀한 부존자원이 수시로 중국에 헐값에 넘어가고 있는 현실을 그저 보고만 있을 것인가.

세번째와 네번째 항목은 이산가족의 상봉을 포함한 인도적인 교류와 사회와 문화 분야에 있어서 교류활성화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산가족의 상봉을 속히 정례화하고 대상도 확대해야 한다. 세대가 바뀌면서 남북의 친·인척 구성도 많이 변했다. 평창올림픽 때 남북여성하키단일팀의 구성 문제에 대해서 보였던 남쪽 젊은 세대들의 부정적 반응도 곱씹어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번 선언에는 명기되지 않았지만, 미래를 함께 꾸릴 남북의 새로운 세대 간에 상호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앞으로 많이 마련해야 한다.

다섯번째 항목인 한반도를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땅으로 만들자는 합의는 이번 선언의 핵심이다. 따라서 이 내용에 대한 평가 역시 다양하고 논쟁도 많다. 이번 정상회담의 성과를 혹평하는 측은 특히 북핵 문제에 있어서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폄하한다. 그러나 이번 선언이 남북이 먼저 함께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별,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지혜를 살려 ‘종전선언’을 거쳐 ‘평화협정’으로 가는 길목을 트고, 그동안 부진했던 북·미 간의 핵협상에도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지 않았는가.

북핵 문제의 핵심은 여전히 북·미관계의 발전에 달려 있다. 북·미 협상에서 항상 등장하는 ‘네가 먼저!’라는, 상대방을 향한 끈질긴 요구도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지나면서 많이 약화된 분위기다. 북·미 간에 있는 상호불신의 단단한 매듭이 아직은 풀리지 않았지만 이 역시 점차 느슨해지고 있다. 9월25일에 뉴욕에서 있었던 한·미 정상회담은 이 같은 분위기를 보여주었고, 2차 북·미 회담도 이미 가시권에 들어왔다. 지난 6월에 있었던 싱가포르 1차 북·미 정상회담의 합의내용을 더 구체화시키는 2차 북·미 회담이 끝나면 북핵 문제는 분수령을 넘을 수 있고, 북·미관계의 단계적인 정상화의 내용과 시간표도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금년 초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상황이 지금 우리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다. 남북은 ‘9월 평양선언’을 확실하게 이행해서 우리 땅의 평화체제를 빨리 정착시켜야 한다. 백두산에 이어 남북 정상이 한라산에서 다시 맞잡은 손을 높이 드는 장면은 세계에 한반도의 평화정착의 과정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큰 메시지가 될 것이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코를 빌려 숨 쉴 수 없다’는 폴란드 격언이 있다.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겠다는 단합된 의지, 열정 그리고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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