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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간직하려는 재일동포 1세들의 묘지묫자리까지 차별받았던 재일동포들의 애환..죽어서도 한국 뿌리 지키려 노력
이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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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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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자 / 일본 도호쿠대학 교수

   
 

2월20일과 21일 이틀 동안, 재일동포들이 공동으로 만든 공원묘지 두 곳에 갔습니다. 간사이(關西) 지방의 나라(奈良)시와 교토(京都)부에 있는 광산김씨 공원묘지(共同靈園), 그리고 한국 절 고려사 경내에 있는 공원묘지입니다. 두 곳은 모두 제가 26년 전, 석사 논문 연구를 위해 찾았던 묘지입니다. 연구를 마치고 대학에 자리 잡은 후에도 광산김씨 친족회 모임에 참석하거나 고려사의 태연 관장스님을 가끔 찾아뵙곤 했습니다. 하지만 2011년 3·11 재해 이후 처음으로 갔기에 8년 만인 셈입니다.

異国一生涯 為後孫標記
茲地帰化土 望観察探根
타국에서 평생을 살고 후손을 위해 표기한다.
이 땅에서 흙으로 돌아가지만 관찰해서 뿌리를 찾기 바란다.
(재일동포 1세 밀양 박씨의 묘비명에서)

"돌에 새기면 100년은 가잖아요.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것은 아주 서글픈 일이라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납골하는 공간에 유골만이 아니라 족보와 앨범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후손에게 힌트를 주기 위해 저런 한시(漢詩)를 적어 놓았습니다."(26년 전 재일동포 1세 박동명씨와의 인터뷰에서) 족보를 다이제스트 판으로 옮겨 놓은 듯한 묘표(墓標)에는 조부로부터 시작해 자녀까지 4대가 모두 한국 이름으로 적혀 있습니다.

   
▲ 풍수지리를 보고 정한 광산김씨 공원묘지(共同霊園) ⓒ 이인자 제공

묘 납골 장소에 족보·앨범 보관

묘지가 세워진 지 1년 후에 제가 조사를 가서 박동명씨를 만났던 것 같습니다. 박씨는 8년 전에 타계해 이 묘에 묻히셨습니다. 그는 생전에 동포들의 커뮤니티인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지역 단장을 지냈고 1988년 서울올림픽 때엔 한국 정부에 내는 거액의 기부에 참여했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자신의 뿌리에 대해 열중하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1.5세라고 할 수 있는 그를 처음 만난 26년 전, 인터뷰를 일본어로 해야 했고 한국어는 어눌한 편이었습니다. 외국 삶이 모두 그렇듯이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교육에 몰두하다 보면 한국어를 접하고 사용하는 기회가 적어져 잊어가게 되지요. 그가 활발한 민단 활동이나 조국을 위한 기부며 한국에도 없을 법한 묘비명을 쓰게 된 계기는 고향과 동포들의 모임을 좋아하셨던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라고 했습니다. 특히 자녀 결혼 문제에 봉착했던 50대 후반부터 변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비교적 일본 사회에서 성공한 그는 2남1녀 자녀들이 재일동포와 결혼하길 바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장 먼저 결혼한 장남이 자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인과 결혼했던 것입니다. 그를 속상하게 했던 것은 무엇보다 일본식으로 결혼식을 올릴 수밖에 없었던 점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재일동포 커뮤니티의 자녀 결혼식 피로연은 화려하고 흥겨웠다고 합니다. 부모들이 자랑으로 삼는 피로연은 치마저고리를 차려입은 친인척들이 우리 가락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며 도심의 훌륭한 호텔 연회장에서 벌이는 한판 잔치였다고 합니다. 꿈에 그리던 그런 결혼식을 못한 것이 한이 됐다고 합니다.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의 묘를 생전에 자신이 직접 지었다고 했습니다. 일본인과 결혼하는 후세들을 보며, 5대 정도 지나면 자신이 어떤 뿌리를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위와 같은 한시를 새기고 먼 후세에 가서 자신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자손이 있다면 알 수 있도록 묘에 그 힌트를 묻어 놓았습니다. 묘의 납골 장소에 15권이나 되는 족보와 4대 정도의 가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는 앨범을 넣었습니다.

   
▲ 시조 조상으로부터 몇 대손이며 이국땅에 와서 자손이 얼마나 있는지를 알려주는 묘비명 ⓒ 이인자 제공

뿌리 잊지 않으려는 노력 성과로 나타나

앨범에는 한국·일본·북한에 있는 친척들의 일상적인 사진, 단체사진과 함께 그만큼 흩어져 세워진 조상의 묘, 그 소재지를 알 수 있는 자료의 사진이 실려 있었습니다. 곱고 반짝이는 양장 앨범은 사진관에 특별 주문해 책자처럼 만들어 모든 친척들이 족보처럼 갖도록 했다고 합니다. 지하 납골 장소에 오래 있어도 상하지 않게 촛농으로 하는 밀폐 포장을 해서 넣었다고 하더군요.

재일동포에게 "왜 우리말을 못 하세요?"라는 말을 자주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만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인사처럼 말입니다. 25년 만에 조사를 위해 찾아온 광산김씨 공원묘지는 130기 정도 있던 묘가 160기 정도로 늘어나고, 여러 사람이 새롭게 세우기도 했지만 없어진 묘비도 많았습니다. 오사카(大阪)를 중심으로 간사이에 사는 재일광산김씨 친족회가 설립된 지 올해로 64년입니다. 조국 통일 후에 고향으로 뼈를 가져가 묻고 싶어 했던 선배들을 위해 가매장 장소로 조성한 공동묘지는 어느덧 59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1993년부터 1994년까지 재일동포 묘를 조사했습니다. 그들은 죽은 후에도 차별을 받고 있었습니다. 마을 공동묘지는 물론 공영의 공원묘지에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묫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습니다.

   
▲ 일본 교토부에 있는 고려사 ⓒ 이인자 제공

그래서 제가 조사하여 분석했던 재일동포의 묘지 720기는 고려사 묘지와 광산김씨 묘지의 200기 외에는 일본인들이 묻혀 있는 사립묘지나 버려진 땅을 조성해 만든 묘가 대부분이었습니다. 59년 전에 1000여 평의 땅을 사서 친족회 공동묘지로 사용할 것을 생각했던 광산김씨의 지도부는 선견지명을 갖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재일광산김씨 친족회의 가장 큰 행사는 음력 추석에 거행되는 성묘입니다. 지금도 300여 명이 묘지에 모여 제를 올리고 묘소 윗자락 평평한 곳에서 하루를 평안하게 놀다 간다고 합니다.

일본 국적을 받아 이제는 광산김씨라는 걸 묘소에 왔을 때만 서로 의식한다는 사람도 있고, 아직도 '김'이라는 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를 안내해 줬던 친족회 간부를 하고 있는 분은 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일본인)의 아들이라고 자기를 소개해 줬습니다. 아버지는 본처가 있는 고향에 묻히시고 어머니를 이곳에 모셨다고 했습니다. 친족회 묘지에 일본인인 어머니를 모시지 않았다면, 또한 광산김씨 친족회의 존재가 없었으면 자신은 뿌리 없는 존재(根無し草)였을 텐데 그렇지 않아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그날, 너무 오랜만에 찾은 재일동포 1세들의 묘지를 보면서 그들이 타향인 일본에 살면서 근본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심어주기 위해 만든 묘지가 그 성과를 보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본 땅은 일본인들만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여러 방법으로 원래 뿌리를 잊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새롭게 자기 터를 닦아 뿌리내리고 있는 곳이라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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