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수 / 기자

일제에서 해방된 지 거의 74년이 됐다. 그러나 일제 잔재 청산은 아직도 우리 사회의 주요 화두다. 문재인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친일 잔재 청산을 국정의 핵심 과제로 제시한 이후 친일 청산이 가능한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그 논쟁을 보면서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제와 싸웠을까? 그들은 일제의 흔적을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싸운 걸까? 반일이 그들이 원한 최고의 가치였을까? 아무래도 아닌 거 같다. 독립운동가들은 우리와 우리 자손의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우리의 인권을 박탈하고 민족의 생존권을 위협하던 게 일제였기에 일제와 싸운 거였다.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가 우리를 위협했어도 똑같이 싸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독립과 건국의 핵심 가치는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이어야 한다. 이는 대한민국의 핵심 가치를 명문화한 헌법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헌법은 국민 주권과 자유 평등 등을 최고 가치로 제시한다. 헌법을 샅샅이 뒤져도 반일이나 일제 잔재 청산은 암시조차 찾을 수 없다.

그렇기에 반일과 일제 잔재 청산은 대한민국의 핵심 가치 실현이라는 한계 안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우리가 일본에 위안부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건 친일 잔재를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다. 일제의 행위가 인류 보편적 인권을 참담하게 침해했기 때문이다.

반면 핵심 가치를 위배하는 반일은 거부해야 한다. 일본 제품을 불매하고 일본 문화를 배척하자는 주장이 그런 예다. 특정 국가의 문화와 제품만을 꼭 찍어 차별하는 것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에 위배된다. 일본 기업도 이 땅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기업 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우리가 추구하는 시장경제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속박하는 근원에 친일 잔재가 있다고 믿는다. 친일 잔재 청산 자체가 대한민국의 핵심 가치 실현과 직결된다고 주장한다. 대통령도 비슷한 생각인 것 같다.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좌우의 적대, 이념의 낙인은 일제가 민족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2월 `검찰·경찰 개혁 전략회의`에서는 "올해 우리는 일제시대를 거치며 비뚤어진 권력기관의 그림자를 완전히 벗어버리는 원년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라는 말도 했다.

그러나 나는 대통령이 이념의 낙인 등을 말하며 왜 친일 잔재를 거론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이념의 낙인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 가치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이 점만 지적해도 과거의 잘못된 행태를 없애자는 주장을 충분히 할 수 있다. 직접 관련도 없는 `친일 잔재`를 거론하는 것보다 더 이해하기 쉽고 더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

더욱이 일제 이전 우리 역사 역시 인권침해나 이념의 낙인에서 절대 자유롭지 못하다. 조선시대에는 고문이 수시로 자행됐다. 같은 민족을 물건처럼 사고파는 노비제는 중국·일본보다 훨씬 오래 지속됐다. 이념 대립은 일제가 없었어도 존재했을 게 분명하다. 좌우 대립은 대부분 국가의 공통 현상이다. 다만 독재국가들은 반대편을 색깔론으로 탄압하고 민주국가는 그 대립을 성장 에너지로 활용한다.

중요한 건 본질에 집중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이 바로 그 본질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건국 이후 그 본질 가치를 실현하지 못한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일제에 협조해 그 핵심 가치를 탄압한 장본인들이 정부 수립 이후 높은 자리에 앉았다.

유신 정권과 제5공화국 정권은 기본권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었다. 남 탓보다는 그 같은 우리 역사를 반성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판단과 행동의 최우선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국제 관계에서도 그 가치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는 나라와 세력이 우리의 친구이며 그 반대쪽은 우리에게 위협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내치든 외교든 반일보다 핵심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는 게 독립과 건국 정신을 실현하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