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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패전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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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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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걸 / 논설위원

380년 전 쌍령리전투에서 / 4만명이 300명에게 전몰 / 핵·미사일 위협하는데 / 누가 훈련 중단시켰나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 가구거리 길 건너편에 정충묘(精忠廟)라는 곳이 있다. 광주시 유형문화재 제1호이다. 가슴 아픈 비극이 스며 있는 곳이다. 안내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정충묘는 1636년 병자호란 때 쌍령리전투에서 분투하다 전사한 장군들을 모신 사당이다. 당시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를 구하기 위해 북상하던 영남의 근왕병들은 이곳에서 청나라 군사들에게 선제공격을 당했고 수많은 장병과 함께 전사했다. 사당 안에 봉안된 신위는 4위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허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민영, 안동영장 선세강, 죽산산성 성주 이의배 등이다.’

383년 전 비극의 실상은 이렇게 무미건조하지 않다. 중요한 사실을 빼놓았다. 남한산성에 고립된 왕을 구하려고 이 좁은 길목으로 숨 가쁘게 4만명이 올라왔다. 문관 지휘관은 추위를 피해야 한다며 평지에 목책을 세우고 진지를 구축하도록 했다.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군사전문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새벽에 적 33명이 산꼭대기에서 말을 타고 달려들었다. 전방 포수들이 우왕좌왕하자 진지 내 군인들이 혼비백산했고 화약마저 폭발해 아비규환이 됐다. 적이 총돌격해 좌우 날개를 쓸어버리자 아군은 힘 한번 쓰지 못하고 몰살당했다. 적은 겨우 300명이었다. 지휘부가 판단을 잘못하면 군사들이 개죽음한다는 것을 보여준 참패의 현장이다. 임진왜란 때 원균이 벌인 칠천량해전에 버금가는 최악의 졸전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지도부의 잘못은 말하지 않고 있다.

이보다 불과 44년 전인 1592년 일본은 포르투갈 무역상을 통해 구입한 조총을 복제해 무장한 뒤 조선을 침략했다.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됐던 황윤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반드시 공격해 올 것”이라고 보고했는데도 왕은 뭉개버렸다. 황윤길이 귀국 길에 쓰시마 도주에게서 받은 조총 2정을 들고 가 위협성을 경고했는데도 무시해버렸다. 부산 함락 소식이 들리자 왕은 줄행랑을 쳤다. 그가 선조다.

2017년 김정은이 핵무력을 완성했다고 선언했다. 로켓 강국 위업도 실현했다고 했다. 우리 정부 분위기를 보면 그의 말을 뻥으로 듣는 듯하다. 북한은 미사일을 연달아 발사한 뒤 주변국 반응을 떠보고 있다. 신형전술유도무기라고 발표했더니 문재인정부는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다. 미국은 과거에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때 하와이 주민들에게 경보 사이렌을 울릴 정도로 긴장했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후 김정은은 러시아를 방문해 관계 회복을 도모했다. 중국은 순망치한 관계다. 일본은 조건 없이 정상회담하자고 안달하고 있다.

위기를 대화국면으로 반전시킨 데 대해서는 문재인 대통령의 노력을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김정은과 세 차례 만났고 군사합의도 이뤄냈다. 김정은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만나게 하는 데도 기여했다. 대단한 반전이다. 그런데 의문이 여전히 가시지 않는다. 협박을 일삼던 김정은이 왜 갑자기 2018년 신년사를 통해 평창동계올림픽 참가 의사를 밝히고 여동생을 사절로 서울에 보냈을까.

핵과 장거리미사일 기술 확보에 따른 군사적 우위를 지렛대 삼아 한국을 통해 미국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기에 행동을 바꾼 게 아닐까. 어떤 도발을 하든 문재인정부가 반발하거나 맞대응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 아닐까. 주도권은 자기가 쥐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 아닐까. 문재인정부가 미국의 돌출 행동을 막아 대화의 판을 깨지 않게 할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는 게 아닐까. 의문이 꼬리를 물지만 답이 없다.

지금 군사적 위기를 380년 전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안이한 대응은 비슷해 보인다. 저쪽은 최신 기술과 가공할 무기로 무장한 채 덤벼들 채비를 하는데 이쪽은 위험하지 않다고 한다. 군 전문가들이 경고하는데도 지휘부는 자신의 신념을 앞세우고 있다.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가.

쫓겨난 장군 박찬주는 말한다. “4·27 남북정상회담 이후 군대에서 훈련이 사라졌다. 군사훈련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마지노선이다. 어떻게 국방장관이 종전선언으로 북한의 비핵화를 견인한다고 할 수 있나.” 그는 문재인 대통령을 선조와 비교하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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