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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를 떠나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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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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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 / 논설위원

불발된 오사카 한·일 정상회담 / ‘과거’가 ‘현재’의 발목잡는 상황
아베 총리의 통큰 결자해지 기대

   
 

‘혹시나’ 하는 기대는 물거품으로 끝났다. 오사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의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의 회담은 결국 불발됐다. 2박 3일 중 두 사람이 만난 건 8초의 악수가 전부다. 현장을 관찰한 기자들은 “악수하고 헤어지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20초였다”고 냉랭한 분위기를 전했다.

환영 만찬에서도 한국은 주빈 대접을 받지 못했다. 아베 총리가 주재한 헤드 테이블엔 트럼프 미국 대통령,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메르켈 독일 총리, 모디 인도 총리, 트뤼도 캐나다 총리 등 주요국 정상들이 자리했지만 문 대통령의 자리는 없었다. 문 대통령 부부는 헤드 테이블 오른쪽에 따로 마련된 테이블에서 식사해야 했다.

이웃 나라로부터의 홀대가 더욱 크게 느껴진 탓일까. 문 대통령은 29일 귀국길에 오르면서 이례적으로 ‘오사카를 떠나며’라는 트윗글을 올렸다. 정상 간 신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이지만 아베발 ‘패싱 논란’을 의식한 측면도 있어 보인다.

과거사는 한·일 관계의 블랙홀이다. 더구나 ‘과거사’가 정치 공방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현재의 삶’의 발목을 잡는 심각한 지경까지 이르렀다. 한인 상공인이 겪은 체험담이다. 도쿄에서 식당을 여럿 운영하는 그는 최근 식당 몇 개를 문 닫아야 할 위기에 빠졌다. 큰 기업의 단체 회식손님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법인 카드로 회식을 하면 총무과로부터 “‘굳이 한국 식당에서 회식을 해야 하는가?’ 하는 전화를 받게 되니 아예 발길을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중고차 딜러를 하는 교포사업가는 올해 들어 매매 성사 건수가 확 줄었다고 한다. 한국의 운전면허를 자동으로 일본 면허로 바꿔주는 제도가 있는데, 최근 들어 과거엔 없었던 인터뷰를 요청하거나 추가 서류를 요구하면서 시간을 끌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사례는 줄을 잇는다. 문 대통령과 가진 오사카 교포 간담회에서 “양국 관계 악화가 장기화하면 재일동포의 삶에 큰 영향을 준다. 우리에겐 사활이 걸린 문제”라는 말까지 나온 건 예사롭지 않다.

삶의 현장에선, 강제징용자 대법원 판결 이후 일본 정부가 공식화한 보복조치가 이미 집행 단계에 들어선 것으로 느끼고 있다. 다만 아직 전면적인 확장 단계가 아닐 뿐이다. 삼성·LG와 같은 글로벌 대기업에 피해가 없다고 해서 ‘문제없다’고 보는 정부의 안이한 인식은 현실에 무지한 것이거나 책임 회피를 위해 현실을 외면하는 것, 둘 중 하나다. 그러니 “일본이 보복성 조치를 취하면 우리도 가만있을 수 없다”는 강경화 외교부장관의 발언이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그나마 한·일 관계가 험악한 가운데서도 지난해 양국의 관광객 수가 1000만명(한국인 700만명, 일본인 300만명)을 넘었다는 건 다행스런 일이다. 하지만 희망 섞인 전망과 현실 문제는 구분 지어야 한다.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후카가와 와세다대 교수는 “눈에 보이는 것만 문제가 아니다. 일본의 대한 신규 투자가 줄어들고 각 부문에서의 교류와 협력이 차단되면서 놓쳐버리게 되는 기회비용이 더 크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일 관계가 정상적으로 돌아갔다면 청년 실업, 고령화 문제 등에서 시너지를 낼 수 있는데 기회 자체가 박탈되면서 입게 되는 손실이 더 크다는 주장이다. 곱씹어볼 대목이다.

도쿄에 한 달간 체류하면서 많은 지식인들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대부분 당국 간 대화의 단절을 답답해했다. 양국의 경직된 정치 리더십의 문제를 지적했다. 이전에도 과거사 문제는 있었다. 식민통치→해방→분단으로 이어지는 비극적 현대사에서 한국의 요구가 관철된 적이 없기 때문에 가해자-피해자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탓이다. 그렇다고 지나간 과거를 바꿀 수 없다. 백번을 사과하고 거액의 배상금을 준다 해도 식민통치의 불법성과 부도덕성이 없어지진 않는다. 피해자들의 상처와 감정의 앙금까지 씻어낼 수도 없다. 결국 미래지향적 관계로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과거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뿐이다. 미래 세대를 위한 양국 관계의 발전과 청사진이야말로 과오와 앙금을 털고 앞으로 나가게 하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아베 총리는 이달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한다면 11월 20일께 최장수 총리인 가쓰라 다로(2886일)의 기록을 갈아치우고 일본 사상 최장수 총리로 등극할 전망이다. 그에 걸맞은 레거시가 필요하다. 역설적으로 한반도 침탈의 본거지이자 일본 근대화를 주도한 야마구치(과거 조슈번) 정치인이란 게 열쇠가 될 수 있다.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실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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